어휘력에는 축이 두 개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단어를 아는가(넓이)와 한 단어를 얼마나 깊이 아는가(깊이)입니다. 단어장을 아무리 넘겨도 실력이 안 느는 느낌이 든다면 대개 넓이만 늘리고 깊이는 그대로 둔 상태입니다. 둘은 따로 자랍니다.
단어를 안다는 말이 너무 뭉뚱그려져 있다
“이 단어 알아?”라는 질문에 우리는 보통 예 아니오로 답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는 정도가 층층이 다릅니다.
어디서 본 적은 있는 단어, 뜻은 아는데 발음은 모르는 단어, 읽으면 알겠는데 쓸 일이 없는 단어, 실제로 문장에 넣어 써 본 단어가 전부 “안다” 한 단어로 묶입니다. 단어장에서 체크 표시를 하는 순간 이 층위가 전부 뭉개집니다.
그래서 개수는 정직한 숫자가 아닙니다. 3,000개를 외웠다고 할 때, 그 3,000개가 어느 층에 있는지는 아무도 세지 않습니다. 세는 방법도 딱히 없고요.
넓이와 깊이는 서로 다른 축이다
넓이는 아는 단어의 가짓수입니다. 깊이는 한 단어에 대해 아는 정보의 양입니다.
둘은 같이 자라지 않습니다. 단어장을 빠르게 넘기면 넓이만 늘고, 같은 단어를 여러 글에서 반복해 만나면 깊이가 늘어납니다. 시험 준비는 구조상 넓이 쪽으로 기울어 있어서, 점수는 오르는데 말하거나 쓸 때는 여전히 막히는 상태가 흔하게 만들어집니다.
정체기라고 느끼는 지점이 대개 여기입니다. 넓이가 늘고 있는데도 체감이 없으면, 늘려야 할 축이 반대쪽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 단어를 안다는 건 최소 세 층이다
어휘 연구자 폴 네이션은 한 단어를 안다는 것을 형태, 의미, 사용의 세 갈래로 나눕니다. 각 갈래 안에도 항목이 더 있지만, 학습자가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 층 | 무엇을 아는가 | 몰라서 생기는 증상 |
|---|---|---|
| 형태 | 철자, 소리, IPA, 강세 | 읽으면 아는데 들으면 못 알아듣는다 |
| 의미 | 기본 뜻, 두 번째 뜻, 뉘앙스 | 사전 뜻으로 옮겼는데 어색해진다 |
| 사용 | 같이 쓰는 단어, 전치사, 격식 수준 | 문장에 넣으면 어딘가 틀린다 |
세 층은 순서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소리를 모른 채 뜻만 아는 단어가 수백 개 쌓이는 일은 아주 흔합니다. 눈으로만 외우면 형태 층의 절반이 비어 있는 채로 의미 층만 올라갑니다.
두 단어로 보면 더 분명합니다. discuss는 의미 층이 거의 비어 있을 수 없는 단어입니다. 뜻이 단순하니까요. 그런데 사용 층에서 자주 걸립니다. 뒤에 전치사를 붙이지 않고 목적어가 바로 오는데, 한국어 “~에 대해 논의하다”를 그대로 옮기면 about을 붙이게 됩니다. 뜻을 몰라서 틀리는 게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이는 자리를 몰라서 틀리는 경우입니다.
comfortable은 반대쪽입니다. 뜻과 쓰임은 대체로 문제가 없는데 형태 층이 비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철자만 보면 네 음절처럼 보이지만 실제 발화에서는 앞쪽이 뭉쳐서 더 짧게 발음됩니다. 눈으로만 외운 사람은 이 단어를 듣고도 못 알아봅니다. 같은 단어를 알고 있는데 층이 다르게 비어 있는 것입니다.
깊이가 얕으면 정확히 어디서 막히나
얕은 단어는 읽을 때는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 단어를 꺼내 쓸 때 생깁니다.
제일 흔한 건 전치사입니다. depend는 아는데 depend on이 안 붙습니다. 그다음이 짝 단어인데, make와 do 중 뭐가 붙는지 어떤 명사와 어울리는지가 안 떠오릅니다. 격식 수준도 자주 걸립니다. 뜻은 맞는데 이메일에 쓰기엔 너무 캐주얼하거나, 반대로 문장 하나가 갑자기 논문처럼 굳습니다.
격식 쪽은 특히 눈에 잘 안 띕니다. 사전에 격식 표시가 붙어 있어도 한국어 뜻풀이만 보고 넘어가면 그 정보는 안 넘어옵니다. 그래서 회사 메일에 구어체 단어가 들어가거나, 반대로 친구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논문처럼 읽히는 일이 생깁니다. 둘 다 뜻은 맞습니다.
세 경우 모두 뜻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건 뜻이 아니라 그 단어가 실제로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에 대한 정보입니다.
개수 목표가 만든 착시
한국에서 어휘 공부는 대체로 개수로 표현됩니다. 빈출 3,000단어, 하루 50개, 한 달에 한 권. 목표가 선명해서 좋은 방식이고 초반에는 실제로 잘 굴러갑니다.
문제는 이 방식이 넓이만 측정한다는 점입니다. 하루 50개를 넘기면 진도는 확실히 나가는데, 그 50개가 전부 형태와 의미 층에만 얹히고 사용 층에는 아무것도 안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날 다시 50개를 넘기면 어제 것을 다시 만날 일은 없습니다.
산수를 해 보면 더 뚜렷합니다. 하루 50개씩 한 달이면 1,500개입니다. 그런데 그 1,500개를 한 번씩만 만났다면, 대부분은 한 달 뒤에 형태 층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같은 시간에 300개를 다섯 번씩 다른 문장으로 만났다면 개수는 5분의 1이지만 실제로 쓸 수 있는 단어는 더 많습니다.
그래서 개수는 늘어나는데 쓸 수 있는 단어는 그대로입니다. 진도가 곧 실력이 아니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모든 단어에 깊이가 필요한 건 아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기기 쉬운데, 아는 단어를 전부 깊게 파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건 시간이 감당이 안 되고 효율도 나쁩니다.
기준은 빈도입니다. 그 단어를 앞으로 얼마나 자주 만나느냐요. 자주 쓰이는 단어일수록 깊이가 값을 합니다. get, take, issue, address처럼 쓰임이 넓은 단어는 사용 층을 채워 두면 문장을 만들 때마다 돌아옵니다. 반대로 시험 지문에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학술 단어는 읽고 알아보는 정도, 즉 형태와 의미 층만 있어도 제 몫을 합니다. 그런 단어를 문장에 넣어 쓸 일은 실제로 잘 없습니다.
그래서 배분이 중요합니다. 빈도가 높은 쪽에는 깊이를, 낮은 쪽에는 넓이를 쓰는 편이 같은 시간으로 더 멀리 갑니다. 단어장을 앞에서부터 똑같은 강도로 미는 방식이 비효율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 단어가 얕은지 재보는 법
지금 아는 단어 열 개를 골라서 이렇게 확인해 보시면 대략 감이 옵니다.
· 그 단어를 소리 내어 읽어 봅니다. 강세 위치가 확실하지 않으면 형태 층이 비어 있습니다 · 그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하나 만들어 봅니다. 멈칫하면 사용 층이 비어 있습니다 · 같이 오는 전치사나 짝 단어를 하나 대 봅니다. 안 떠오르면 역시 사용 층입니다 · 이 단어를 이메일에 써도 되는지 판단해 봅니다. 애매하면 격식 정보가 없는 것입니다
열 개 중 몇 개가 통과하는지 세어 보면, 늘려야 할 축이 넓이인지 깊이인지가 대체로 갈립니다. 절반을 넘기지 못한다면 새 단어를 더 넣는 것보다 이미 넣은 단어를 다시 꺼내는 쪽이 먼저입니다.
이 점검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정상입니다. 아는 단어라고 분류해 둔 것이 사실은 절반만 아는 상태였다는 걸 확인하는 과정이라 그렇습니다. 다만 이걸 모르면 계속 넓이만 늘리게 됩니다.
깊이는 어떻게 쌓이나
깊이는 새 단어를 더 외워서 생기지 않습니다. 이미 아는 단어를 다시 만나야 생깁니다.
핵심은 다른 문맥입니다. 같은 예문을 열 번 보는 것보다, 같은 단어를 열 개의 다른 문장에서 만나는 편이 사용 층을 채웁니다. 문장이 바뀔 때마다 그 단어가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가 조금씩 더 보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써 보는 것도 빠른 길입니다. 읽을 때는 얕은 단어도 그냥 지나가지지만, 문장을 만들려고 하면 부족한 층이 바로 드러납니다. 한 문장을 만들어 보고 막히는 지점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 단어에서 뭘 모르는지가 특정됩니다.
간격도 중요합니다. 오늘 몰아서 열 번 보는 것과 몇 주에 걸쳐 열 번 만나는 것은 남는 것이 다릅니다. 이 원리를 다룬 글은 간격 반복 학습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개수 목표를 어떻게 잡을지가 궁금하시면 유창해지려면 단어를 몇 개나 알아야 하는지도 같이 보시면 좋습니다.
보캐비는 어느 쪽을 채우나
보캐비에는 29,000개가 넘는 단어가 들어 있지만, 설계상 신경 쓴 쪽은 넓이보다 깊이입니다.
모든 단어에 IPA와 음성이 붙어 있어서 형태 층의 소리 쪽이 비지 않습니다. 눈으로만 외운 단어가 안 들리는 문제가 여기서 줄어듭니다. 단어마다 예문이 같이 있어서 사용 층도 처음부터 조금은 채워집니다. 그리고 FSRS로 복습 간격을 잡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단어는 더 빨리 돌아오고 확실한 단어는 더 늦게 돌아옵니다. 같은 단어를 시간을 두고 다시 만나는 구조 자체가 깊이 쪽에 붙어 있습니다.
단어 뜻과 발음을 먼저 둘러보고 싶으시면 단어 탐색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어휘력이 정체된 느낌이 든다면 단어장을 한 권 더 사기 전에, 이미 넘긴 단어들이 어느 층까지 차 있는지부터 세어 보시길 권합니다. 대개 답은 그쪽에 있습니다.
App Store에서 보캐비로 영어 단어 공부하기자주 묻는 질문
- 단어 개수를 늘리는 게 의미가 없다는 뜻인가요?
- 아닙니다. 넓이는 여전히 중요하고, 특히 초중급에서는 개수가 늘어야 읽히는 글이 늘어납니다. 다만 개수만 늘리면 어느 지점부터 체감이 멈추는데, 그때 필요한 건 새 단어가 아니라 이미 아는 단어의 깊이입니다.
- 깊이가 얕은 단어는 어떻게 알아보나요?
- 뜻은 바로 떠오르는데 그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라고 하면 멈추는 단어가 얕은 단어입니다. 같이 쓰는 전치사나 짝 단어가 안 떠오르거나, 격식 수준을 모르겠다면 그것도 같은 신호입니다.
- 깊이를 쌓으려면 단어를 몇 번이나 만나야 하나요?
- 연구마다 다르지만 여러 문맥에서 반복해서 만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은 공통입니다.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보는 것보다 서로 다른 문장에서 같은 단어를 만나는 편이 깊이에 도움이 됩니다.
이어서 읽기
어근으로 영어 단어 외우기: 접두사·접미사로 어휘 늘리는 법
어근은 수천 개 영어 단어를 이루는 조각입니다. spect(보다) 하나만 알아도 inspect, spectator, perspective가 한 번에 잡히죠. 어근·접두사·접미사가 어떻게 붙는지, 먼저 외워두면 좋은 것들까지 정리했습니다.
영어 발음 잘하는 법: 발음 교정 실전 가이드
완벽한 원어민 발음보다 또렷하게 알아듣는 발음이 먼저입니다. 내가 약한 소리를 콕 집어 훈련하고, 발음기호를 읽고, 진짜 말의 리듬을 따라 하는 법을 정리했습니다.
영어로 생각하는 법 (머릿속 번역 멈추기)
영어가 느리게 느껴지는 건 머릿속에서 한 번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는지, 단어를 번역이 아니라 개념으로 익히는 법, 그리고 영어로 생각할 만큼 빠른 인출을 만드는 법까지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