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요리 동사가 어려운 건 개수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한국어와 영어가 열을 다른 자리에서 나누기 때문입니다. 굽다 하나가 bake, roast, grill, broil, sear, toast로 갈리고, 반대로 boil 하나가 삶다와 끓이다를 함께 덮습니다. 나누는 기준만 잡으면 외울 양이 확 줄어듭니다.
굽다가 영어로 여러 개인 이유
언어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자리에 선을 긋습니다. 요리 동사는 그 원리가 유난히 잘 보이는 영역입니다.
한국의 조리법은 오랫동안 불 위의 솥과 팬을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물의 상태에 대한 구분이 촘촘합니다. 삶다, 끓이다, 데치다, 조리다, 찌다가 전부 다른 동사입니다. 반면 오븐은 늦게 들어왔고, 오븐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개 굽다 하나로 처리됩니다.
영어권은 반대입니다. 오븐과 직화가 조리의 중심이었으니 그쪽이 잘게 갈라졌습니다. 대신 물에 익히는 쪽은 boil 하나가 넓게 덮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더 정밀한 언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이 그어진 위치가 다를 뿐이고, 우리가 헷갈리는 건 우리 쪽 선이 성긴 자리에서입니다.
증거는 한국어 안에도 남아 있습니다. 베이킹, 로스팅, 그릴, 소테처럼 이 영역의 말들이 대부분 외래어로 들어와 있습니다. 개념이 장비와 함께 왔기 때문에 번역할 토박이말이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데치다나 무치다를 영어로 들여가려면 설명을 붙여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빈자리가 생긴 곳에는 외래어나 풀어쓴 구가 들어섭니다.
오븐과 마른 열: bake, roast, 그리고 겉만 익히는 동사
둘 다 오븐을 씁니다. 장비가 같으니 사전만 봐서는 갈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갈리는 건 재료 쪽입니다.
bake는 반죽이 열을 받아 형태가 잡히는 쪽입니다. 빵, 쿠키, 케이크, 파이. 굽는 동안 재료가 부풀거나 굳으면서 구조가 생깁니다.
roast는 고기나 덩어리 채소를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겉을 갈색으로 만들며 익히는 쪽입니다. 기름을 두르는 경우가 많고, 표면이 마르면서 향이 올라오는 것이 목적입니다.
같은 감자라도 통으로 구우면 roasted potatoes, 크림을 부어 그라탱으로 만들면 baked 쪽 표현을 씁니다.
직화: grill과 broil, 그리고 나라 문제
여기가 제일 함정입니다. 열의 방향이 기준인데, 그 기준을 나라마다 다르게 부릅니다.
| 조리 방식 | 미국 영어 | 영국 영어 |
|---|---|---|
| 아래에서 올라오는 직화 (숯, 화로) | grill | barbecue |
| 위에서 내려오는 직화 (오븐 상단 열선) | broil | grill |
미국 레시피에서 broil the salmon for 5 minutes를 만나면 오븐 위쪽 열선을 켜라는 뜻입니다. 영국 레시피의 grill the salmon도 같은 동작입니다. 반대로 미국식 grill은 야외 화로 쪽입니다.
레시피를 읽다 막히면 단어를 다시 찾기 전에 어느 나라 글인지부터 보세요. 그것만으로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겉만 익히는 동사도 여기 붙습니다. sear는 아주 높은 온도에서 표면만 빠르게 갈색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속을 익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겉에 향과 색을 만드는 단계라서, 보통 다른 조리의 앞이나 뒤에 붙습니다. 스테이크를 sear한 다음 오븐에 넣는 식입니다.
toast는 마른 열로 표면을 노릇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빵에 가장 많이 쓰지만 견과류나 향신료에도 씁니다. toast the almonds는 아몬드를 기름 없이 팬이나 오븐에 살짝 볶으라는 뜻인데, 한국어로 옮기면 볶다가 되어버려서 기름을 두르는 실수가 나옵니다. 여기서도 대응어가 한 칸씩 밀립니다.
기름의 양이 정하는 동사
볶다와 튀기다 사이에 영어는 단어를 네 개 두고, 기준은 대체로 기름의 양과 온도입니다.
- sauté — 적은 기름에 센 불로 재빨리, 팬을 흔들어가며. 프랑스어 sauter(뛰다)에서 왔고, 재료가 팬 안에서 튀어 오르는 모습이 그대로 이름이 됐습니다
- stir-fry — 웍에 센 불, 계속 저으며. 중국식 조리에서 들어온 말입니다
- pan-fry — 팬에 중간 정도의 기름, 뒤집어가며. 전이나 커틀릿 쪽
- deep-fry — 기름에 완전히 잠기게. 튀기다에 가장 가깝습니다
sauté는 발음이 자주 틀리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철자만 보고 읽으면 안 됩니다. /sɔːˈteɪ/로, 뒤쪽에 힘이 들어갑니다.
요리 단어에는 이런 게 몇 개 더 있습니다. 반죽하다에 해당하는 knead는 /niːd/로 k를 읽지 않아서 need와 소리가 같고, purée는 /pjʊˈreɪ/로 끝을 올려 읽습니다. 레시피는 소리 내어 읽을 일이 거의 없는 글이라, 이런 단어는 틀린 발음으로 굳어도 아무도 고쳐주지 않습니다. 눈으로만 익힌 단어가 조용히 잘못 저장되는 전형적인 자리입니다.
물의 온도가 정하는 동사
한국어가 촘촘한 영역이지만, 영어도 온도로는 꽤 나눕니다.
| 영어 | 물의 상태 | 한국어 감각 |
|---|---|---|
| boil | 팔팔 끓는 상태 | 삶다 · 끓이다 |
| simmer | 끓기 직전, 기포가 살짝 | 뭉근히 끓이다 |
| poach | 그보다 더 낮은 온도에서 가만히 | 대응어 없음 |
| blanch | 아주 잠깐 데친 뒤 찬물에 | 데치다 |
| steam | 물에 닿지 않고 김으로 | 찌다 |
blanch와 데치다, steam과 찌다는 거의 정확히 겹칩니다. 이런 짝은 그냥 외워도 손해가 없습니다. 문제는 poach처럼 한국어에 대응어가 아예 없는 쪽인데, 이건 한국어 뜻을 찾지 말고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빠릅니다.
poach가 따로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물이 끓으면 망가지는 재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껍질을 깬 달걀, 흰 살 생선, 배나 복숭아 같은 것들은 기포가 올라오는 물에서 형태가 부서집니다. 그래서 끓기 직전보다 더 낮은 온도에서 가만히 익히는 동작에 이름이 붙었습니다. 삶다로 외워두면 이 조건이 통째로 사라지고, poached egg를 삶은 달걀로 이해하게 됩니다. 둘은 완성된 모양부터 다릅니다.
썰고 섞는 동작도 구조가 같습니다
열만 그런 게 아닙니다. 칼과 손이 하는 일에서도 똑같은 어긋남이 일어나고, 이쪽이 실전에서 더 자주 걸립니다. 레시피의 첫 단락은 대부분 손질 동사로 채워져 있으니까요.
| 한국어 | 영어 | 갈리는 기준 |
|---|---|---|
| 썰다 | chop | 대충 굵직하게 |
| 썰다 | dice | 고른 정육면체로 |
| 썰다 | mince | 아주 잘게, 마늘이나 생강 |
| 썰다 | slice | 얇고 납작하게 |
| 썰다 | grate | 강판에 갈아서 |
| 섞다 | stir | 숟가락으로 둥글게 |
| 섞다 | whisk | 거품기로 공기를 넣으며 |
| 섞다 | fold | 공기가 빠지지 않게 살살 |
썰다가 다섯으로 갈리는 기준은 단순합니다. 조각의 크기와 모양입니다. dice는 크기가 고른 육면체를 뜻하기 때문에 dice the onion이라고 적혀 있으면 대충 써는 게 아니라 각을 맞추라는 지시입니다.
섞다 쪽은 조금 더 까다롭습니다. stir와 whisk는 도구와 세기의 문제지만, fold는 목적 자체가 다릅니다. 거품 낸 흰자나 크림을 반죽에 넣을 때, 공기를 지키는 것이 동작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fold를 섞다로 외운 사람은 레시피대로 했는데 케이크가 안 부푸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국어 대응어가 그 단어의 핵심을 통째로 버리는 드문 사례입니다.
여기에도 미국과 영국이 갈리는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갈아놓은 소고기를 미국에서는 ground beef, 영국에서는 minced beef라고 씁니다. grill과 broil에서 봤던 것과 같은 종류의 어긋남입니다.
영어가 못 나누는 자리도 있습니다
균형을 위해 반대 방향도 짚고 갑니다.
삶다와 끓이다는 한국어에서 분명히 다른 동사입니다. 달걀은 삶고 국은 끓입니다. 익힌 뒤 물을 버리느냐 물째 먹느냐가 갈림길인데, 영어는 둘 다 boil로 처리합니다.
무치다는 더합니다. 영어에 한 단어로 대응하는 동사가 없어서 season and toss 같은 구로 풀어 써야 합니다. 조리다도 마찬가지로 reduce나 braise 근처를 맴돌 뿐 딱 맞는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리 동사는 한국어와 영어 어느 쪽이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각자 필요했던 자리에 선을 그었을 뿐입니다. 이건 직역이 잘 안 되는 자리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구조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들이 단어장에서 안 외워지는 이유
단어장은 영어 하나에 한국어 하나를 붙이는 형식입니다. 이 형식이 요리 동사에서 무너집니다.
bake, roast, grill, broil, sear, toast 옆에 전부 굽다라고 적으면 여섯 개가 한 칸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외운 단어는 읽을 때는 통과되지만 쓸 때 고르지 못합니다. 여섯 중 무엇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애초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음식 이름을 셀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단어마다 붙어 다니는 정보인 것과 같은 종류의 문제입니다. 뜻이 아니라 쓰임이 본체인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을 실제로 가장 자주 만나는 자리는 레시피가 아니라 메뉴판입니다. 메뉴에서는 대개 과거분사 형태로 붙습니다. grilled chicken, roasted vegetables, pan-seared salmon, poached eggs. 동사를 알면 메뉴가 조리법 설명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pan-seared라고 적혀 있으면 팬에서 겉을 강하게 지진 것이고, poached egg는 끓지 않는 물에 껍질 없이 익힌 달걀입니다. 메뉴판 한 장이 사실은 이 동사들의 복습 문제지인 셈입니다.
그럼 어떻게 외우나
기준별로 묶고, 각 단어를 문장 안에서 한 번씩 보는 게 전부입니다.
- 열이 어디서 오는지로 묶습니다. 오븐 안(bake, roast), 아래에서(grill), 위에서(broil), 겉만(sear, toast). 네 덩어리면 끝납니다
- 기름과 물은 양·온도 순으로 세웁니다. sauté에서 deep-fry까지 기름이 늘어나고, boil에서 poach까지 온도가 내려갑니다. 순서가 곧 기억의 손잡이입니다
- 정확히 겹치는 짝은 그냥 외웁니다. blanch는 데치다, steam은 찌다
- 대응어가 없는 건 한국어를 찾지 않습니다. poach는 poach로 두고 정의와 예문으로 익힙니다
- 레시피 한 편을 끝까지 읽습니다. 단어장 열 줄보다 실제 레시피 한 편에서 동사가 자기 자리에 있는 걸 보는 쪽이 오래갑니다
보캐비는 단어마다 발음기호와 원어민 음성, 예문을 함께 담고 있어서 sauté처럼 철자와 소리가 어긋나는 단어를 눈으로만 익히고 넘어가는 일이 줄어듭니다. 복습은 FSRS로 간격을 잡아 자꾸 틀리는 단어가 더 자주 돌아옵니다. 단어를 훑어보고 싶으면 단어 탐색기를 열어봐도 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굽다가 여섯 개로 갈리는 건 영어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두 언어가 선을 다른 데 그었기 때문이고, 그 선이 어디인지만 알면 여섯 개는 네 덩어리로 줄어듭니다.
앱스토어에서 보캐비로 영어 단어 학습하기자주 묻는 질문
- bake와 roast는 무엇이 다른가요?
- 둘 다 오븐의 마른 열로 익히는 것이라 장비는 같습니다. 갈리는 건 재료 쪽입니다. bake는 빵, 케이크, 파이처럼 반죽이 열을 받아 형태가 잡히는 것에 씁니다. roast는 고기나 덩어리 채소를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겉이 갈색이 되도록 익히는 것에 씁니다. 같은 감자라도 통째로 구우면 roast, 그라탱으로 만들면 bake 쪽에 가깝습니다.
- grill과 broil은 왜 헷갈리나요?
- 미국 영어에서 grill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직화, broil은 위에서 내려오는 직화입니다. 그런데 영국 영어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열을 grill이라고 부르고, 미국식 grill에 해당하는 야외 조리는 barbecue라고 합니다. 같은 grill이 두 나라에서 반대쪽 열을 가리키는 셈이라, 레시피를 볼 때는 어느 나라 글인지 먼저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 요리 동사는 단어장으로 외우면 안 되나요?
- 뜻만 적힌 단어장으로는 잘 안 됩니다. 이 단어들은 한국어 대응어가 일대일이 아니라서 굽다라고 적어두면 여섯 개가 전부 같은 칸에 들어가 버립니다. 대신 열이 어디서 오는지, 기름이나 물이 얼마나 쓰이는지 같은 기준으로 묶고, 각 단어를 예문 안에서 보면 자리가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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