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철자가 발음과 어긋나는 건 예외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15세기 후반 인쇄술이 들어오면서 철자가 먼저 굳어 버렸고, 그 뒤로도 모음은 계속 움직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철자는 대체로 600년 전 발음을 적어 둔 기록입니다.
한글을 쓰는 사람에게 유독 억울한 이유
한글은 소리를 적으려고 만든 글자입니다. ‘사과’를 보면 어떻게 읽는지 고민할 일이 없습니다. 처음 보는 단어라도 일단 소리 내어 읽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를 쓰는 사람은 글자가 소리를 알려 준다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through, though, thought, tough, cough를 만납니다. 다섯 단어가 -ough라는 같은 네 글자를 공유하는데 읽는 법은 전부 다릅니다.
| 단어 | 발음 | -ough가 내는 소리 |
|---|---|---|
| through | /θruː/ | 우 (끝소리 없음) |
| though | /ðoʊ/ | 오우 (끝소리 없음) |
| thought | /θɔːt/ | 오 + ㅌ |
| tough | /tʌf/ | 어 + ㅍ |
| cough | /kɔːf/ | 오 + ㅍ |
같은 네 글자가 다섯 가지로 읽힙니다. 규칙을 찾으려고 붙잡고 있어 봐야 나오지 않습니다. 애초에 하나의 규칙에서 나온 형태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 자기 탓을 합니다. 규칙을 덜 외웠나, 감이 없나 하고요. 그런데 영어 철자는 지금의 영어 발음을 적으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닙니다. 600년쯤 전의 발음을 적어 둔 기록에 가깝고, 그 뒤로 아무도 고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인쇄기가 철자를 먼저 얼려 버렸다
1476년, 윌리엄 캑스턴이 잉글랜드에 인쇄기를 들여왔습니다. 그전까지 영어 철자는 상당히 자유로웠습니다. 필경사마다 다르게 적었고, 지역마다 달랐고, 같은 사람이 한 문서 안에서 다르게 적기도 했습니다.
인쇄가 시작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활자를 짜는 사람은 하나의 표기를 골라야 했고, 한 번 골라 찍어 내면 그 형태가 수백 부로 퍼졌습니다. 표기가 빠르게 통일되기 시작합니다.
그 표기를 고른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캑스턴의 인쇄소에서 활자를 짜던 직공 중에는 플랑드르 출신이 있었고, ghost의 gh는 여기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중세 영어로 gost였습니다. 플랑드르어와 중세 네덜란드어의 gheest에 이끌려 15세기 초 캑스턴의 인쇄물에 gh 형태가 나타났고, 16세기 중반부터 널리 퍼졌습니다.
ghost의 h가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의 답이 결국 15세기 런던 인쇄소의 어느 외국인 직공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표기의 표준은 위원회가 아니라 작업장에서 정해졌고, 그 작업장에 누가 앉아 있었는지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문제는 타이밍입니다. 하필 철자가 굳어 가던 그 시기에, 영어 발음 쪽에서는 훨씬 큰 사건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다음에 모음이 통째로 움직였다
대모음추이라고 부르는 변화입니다. 대략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영어의 긴 모음들이 하나씩 자리를 옮겼습니다. 한두 단어가 아니라 체계 전체가 밀려 올라갔습니다.
철자는 이미 굳은 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영어 철자는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소리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 철자 | 철자가 굳던 무렵의 소리 (재구성) | 지금 소리 |
|---|---|---|
| name | 긴 ‘아’에 가까움 | /neɪm/ |
| see | 긴 ‘에’에 가까움 | /siː/ |
| time | 긴 ‘이’에 가까움 | /taɪm/ |
| moon | 긴 ‘오’에 가까움 | /muːn/ |
| house | 긴 ‘우’에 가까움 | /haʊs/ |
옛 소리 쪽은 정확한 음가가 아니라 학자들이 재구성한 근사값이니 참고만 하세요. 방향은 분명합니다. time의 i는 원래 ‘이’였고, house의 ou는 원래 ‘우’였습니다. 지금도 철자는 그때 소리를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긴 모음에만 적용됐습니다. 그래서 같은 뿌리를 가진 단어 짝에서 모음이 갈라지는 현상이 생깁니다.
- divine /dɪˈvaɪn/ 인데 divinity /dɪˈvɪnəti/
- serene /səˈriːn/ 인데 serenity /səˈrɛnəti/
- crime /kraɪm/ 인데 criminal /ˈkrɪmɪnəl/
- sane /seɪn/ 인데 sanity /ˈsænəti/
앞쪽 단어에서는 모음이 길어서 변화를 겪었고, 뒤에 음절이 붙은 쪽에서는 짧아져서 옛 소리에 가깝게 남았습니다. 어미가 붙으면 왜 모음이 바뀌는지 외울 필요는 없지만, 이게 불규칙이 아니라 한 사건의 흔적이라는 걸 알면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습니다.
라틴어처럼 보이려고 없던 글자를 넣었다
여기에 사람 손이 한 번 더 닿습니다. 15~16세기 학자들은 영어 단어가 라틴어 뿌리를 드러내는 게 더 품위 있다고 여겼고, 발음에 없는 글자를 철자에 끼워 넣었습니다.
debt이 그렇습니다. 이 단어는 1300년경 프랑스어 dette 형태로 영어에 들어왔습니다. b는 없었습니다. 1400년 이후에 라틴어 debitum을 근거로 b를 철자에 집어넣은 겁니다. 소리를 되살린 게 아니라 글자만 넣었습니다.
island은 더 이상합니다. 고대영어 igland에서 온 말이고, ieg에 land가 붙은 순수한 게르만계 단어입니다. 그런데 16세기에 isle과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s가 들어갔습니다. isle은 라틴어 insula에서 온 전혀 다른 계통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island의 s는 어원적 근거가 없는 글자입니다. 누가 잘못 짚어서 넣은 글자 하나가 500년을 버텼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사례가 영어 철자의 성격을 제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례를 더 보고 싶다면 영어의 묵음 글자를 따로 정리해 뒀습니다.
외래어는 자기 철자를 들고 들어왔다
영어는 남의 단어를 아주 많이 받아들였고, 대개 원래 철자를 그대로 데려왔습니다.
- 프랑스어에서: ballet, bouquet, genre — 프랑스어 읽는 법을 알아야 읽힙니다
- 그리스어에서: psychology, chaos, chorus — ps와 ch가 영어 규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 이탈리아어에서: pizza, allegro
- 독일어에서: kindergarten
한국어도 외래어를 쓰지만 한글로 적는 순간 우리 표기 체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뷔페’는 뷔페라고 읽으면 됩니다.
영어는 그 과정을 대체로 건너뛰었습니다. 덕분에 영어 하나를 읽으려면 남의 나라 읽기 규칙 몇 개를 같이 알아야 합니다.
고칠 기관이 없었다
한국어에는 국립국어원이 있습니다. 표기법을 정하고, 필요하면 고칩니다. 프랑스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1635년부터 같은 일을 해 왔습니다.
영어에는 그런 기관이 없습니다. 여러 차례 철자 개혁 시도가 있었지만 어느 것도 전면적으로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규정할 권한을 가진 곳이 없으니, 한번 인쇄물에 퍼진 형태는 그냥 그대로 남았습니다.
영어 철자가 지저분한 건 누가 관리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관리하는 곳이 없어서입니다. 손대는 사람이 없으니 600년치 흔적이 그냥 쌓였습니다.
그래서 철자는 발음의 증거가 아니다
여기까지가 배경이고, 실전에서 달라지는 건 하나입니다. 처음 보는 단어의 발음을 철자에서 추론하지 마세요. 짐작은 해도 되지만 확인 없이 외우지는 마세요.
이 글을 쓰면서 몇 개를 확인해 봤는데, 저도 오래 틀리게 알고 있던 단어가 몇 있었습니다.
틀린 발음으로 외운 단어는 두 번 손해입니다. 말할 때 안 통하는 건 물론이고, 그 단어를 남이 말할 때 못 알아듣습니다. 머릿속에 저장된 소리와 실제 소리가 다르니까요. 영어를 읽을 수는 있는데 들리지는 않는다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 상태입니다.
한 가지 더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불규칙은 골고루 퍼져 있지 않고 가장 자주 쓰는 단어에 몰려 있습니다. one, two, said, does, women, busy, colonel 같은 것들이요. 자주 쓰이는 형태일수록 사람들이 통째로 기억하기 때문에, 규칙에 맞게 다듬으려는 압력을 잘 견딥니다.
피해 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단어부터 조심하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초급 단어일수록 개별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특히 조심할 자리가 몇 군데 있습니다.
- 강세 위치: 철자에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develop, category, comfortable 같은 단어는 강세를 틀리면 통째로 안 들립니다
- 묵음: knee, subtle, receipt처럼 안 읽는 글자
- 같은 철자 다른 소리: read, live, wind는 문맥에 따라 갈립니다
소리를 따로 저장하는 습관
할 일 자체는 별거 없습니다. 단어를 저장할 때 철자만 남기지 말고 소리도 같이 남기면 됩니다.
- 새 단어를 만나면 소리부터 확인합니다. 뜻을 찾는 김에 발음도 같이 봅니다. 나중에 고치는 것보다 처음에 맞게 넣는 쪽이 훨씬 쌉니다
- 발음기호를 같이 적어 둡니다. 특히 강세 표시를요. 음성은 들을 땐 알겠는데 안 들으면 사라지는데, 기호는 남습니다
- 소리 내어 한 번 읽습니다. 눈으로만 본 단어는 나중에 자기 방식대로 재구성됩니다
- 이미 외운 단어도 가끔 점검합니다. 오래 잘못 알고 있던 단어가 보통 몇 개씩 나옵니다
실제로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새 단어를 저장할 때 뜻 옆에 발음기호를 같이 적고, 강세가 어디 있는지만 표시해 둡니다. 시간으로 치면 단어당 몇 초입니다. 나중에 그 단어를 실제로 듣게 됐을 때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느냐가 여기서 갈립니다.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하나 있습니다. 한국어 소리로 발음을 적어 두는 방식이요. 편하긴 한데 영어에 있고 한국어에 없는 구별이 그 순간 전부 사라집니다. f와 p, r과 l, b와 v가 한글로는 같은 글자가 됩니다. 발음기호가 번거로워 보여도 결국 이쪽이 빠릅니다.
발음기호를 읽는 법 자체가 막막하다면 한국어 사용자를 위한 발음기호 읽기에 기호별로 정리해 뒀습니다.
보캐비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나
보캐비에 있는 29,000개가 넘는 단어에는 전부 발음기호와 원어민 음성이 붙어 있습니다. 따로 찾아서 붙일 필요 없이 단어를 만나는 순간 소리가 같이 옵니다. 철자를 못 믿는 언어에서는 이게 부가 기능이 아니라 기본값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FSRS 간격 반복이 잊을 때쯤 그 단어를 다시 꺼내 줍니다. 발음은 특히 한 번 확인하고 끝내면 원래 알던 방식으로 슬그머니 돌아가는 영역이라, 다시 마주치는 횟수가 중요합니다. 단어 하나가 어떻게 정리돼 있는지는 단어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어 철자가 앞으로 정리될 일은 없을 겁니다. 정리할 주체가 없으니까요. 그쪽은 포기하고, 소리를 따로 챙기는 습관만 들이면 됩니다. 이건 오늘부터 됩니다.
App Store에서 보캐비 받기자주 묻는 질문
- 발음 규칙을 외우면 해결되나요?
- 부분적으로만 됩니다. 규칙 자체는 존재하고 배울 가치도 있지만, 예외가 규칙만큼 많은 데다 하필 자주 쓰는 단어에 몰려 있습니다. 규칙은 처음 보는 단어를 짐작하는 용도로 쓰고, 자주 쓸 단어는 소리를 따로 확인해서 외우는 편이 빠릅니다.
- 영국식과 미국식 중 어느 쪽을 외워야 하나요?
- 한쪽을 정해서 일관되게 가면 됩니다. 문제는 어느 쪽이 맞느냐가 아니라 둘을 섞는 것입니다. 사전이나 앱에서 발음기호와 음성을 볼 때 어느 쪽 기준인지 확인하고, 같은 기준으로만 쌓아 두세요.
- 발음기호를 꼭 읽을 줄 알아야 하나요?
- 음성만 들어도 되지만, 발음기호를 읽으면 소리를 기억으로 붙잡아 두기가 쉬워집니다. 특히 강세 위치는 음성을 한 번 듣는 것보다 기호로 확인하는 쪽이 확실합니다. 기호 서른 개 남짓이면 영어에 필요한 소리는 거의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읽기
영어 발음기호 읽는 법, 한글로 적으면 놓치는 것
strike는 1음절인데 스트라이크로 적으면 5음절이 됩니다. 한글 표기는 편하지만 음절 수, 없는 자음, 강세를 한꺼번에 버립니다. 한국어 화자가 실제로 알아야 할 발음기호만 골라 정리했습니다.
번역기가 좋아졌는데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번역기가 이긴 영역이 꽤 됩니다. 이메일도, 논문도, 계약서도 이제 버튼 하나로 읽힙니다. 그런데 번역기가 아예 들어가지 못하는 자리가 남아 있고, 하필 그 자리가 어휘를 가장 많이 잡아먹습니다. 어디까지 맡기고 어디서 직접 알아야 하는지 정리했습니다.
들리기만 한 영어 단어를 사전에서 찾는 법
팟캐스트에서 단어 하나를 들었습니다. 소리는 대충 기억나는데 철자를 몰라서 찾지를 못합니다. 사전은 하필 우리가 가장 못 알아듣는 부분인 첫 글자순으로 정렬돼 있습니다. 소리에서 출발하는 방법을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