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나 약관을 읽다 막히는 건 대개 모르는 단어 때문이 아닙니다. consideration이나 material처럼 이미 아는 단어가 전혀 다른 뜻으로 서 있는데, 안다고 생각하니 사전을 열 이유가 생기지 않는 쪽이 진짜 함정입니다.
모르는 단어에는 안전장치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읽다가 걸리면 멈추게 되고, 멈추면 찾아보게 됩니다. 불편하지만 결과적으로 틀릴 일이 없습니다.
아는 단어에는 그 장치가 없습니다. 눈이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그 자리에서 단어가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알아챌 계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법률 문서의 단어들은 일상 뜻으로 읽어도 문장이 어느 정도 말이 되게 만들어져 있어서, 틀렸다는 신호조차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약 영어에서 먼저 배워야 할 건 새 단어가 아니라, 이미 아는 단어 중 어떤 것이 이 문서에서 다른 뜻으로 서는지입니다.
한국어 화자에게는 이유가 하나 더 붙습니다. 이 단어들 상당수가 외래어로 이미 들어와 있어서 더 익숙합니다. 파티, 머티리얼, 서비스처럼 귀에 붙어 있는 형태라 낯설다는 감각조차 안 생깁니다. 익숙함이 확인을 막는 구조인데, 여기서는 그 익숙함이 원어의 법률 뜻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consideration은 배려가 아닙니다
가장 자주 걸리는 단어이고, 저도 여기서 한참 헤맸습니다. 일상에서는 숙고나 배려를 뜻하지만, 계약법에서 consideration은 계약을 유효하게 만드는 대가를 가리킵니다. 우리말 법률 용어로는 약인이라고 옮깁니다.
영미 계약법에서는 양쪽이 서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주고받아야 계약이 성립합니다. 그 주고받는 것 자체가 consideration입니다. 그래서 in consideration of the sum of…라는 문구는 어떤 금액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 금액을 대가로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 하나를 배려로 읽으면 문장의 법적 뼈대가 통째로 사라집니다.
왜 이런 개념이 필요한지도 알아 두면 덜 헷갈립니다. 영미 계약법은 약속만으로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주겠다고 한 것은 원칙적으로 강제할 수 없고, 양쪽이 주고받는 구조여야 법이 개입합니다. consideration은 그 주고받음이 있었다는 표시이고, 그래서 계약서 앞부분에 거의 의식처럼 등장합니다.
execute는 처형도 실행도 아닙니다
execute를 실행하다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계약서에서는 그 뜻으로 서지 않습니다. 계약을 execute한다는 건 서명해서 효력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단계 더 있습니다. 계약을 execute하는 것과 계약을 perform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execute는 서명 단계이고, perform은 약속한 내용을 실제로 이행하는 단계입니다. 한국어로 옮기면 체결과 이행의 차이입니다.
The contract was executed on 1 March라는 문장은 3월 1일에 계약 내용이 실행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날 서명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 둘을 섞으면 일정 전체를 잘못 읽습니다.
실무에서 이 차이가 드러나는 자리는 날짜입니다. 서명일과 효력 발생일과 이행 완료일이 각각 다를 수 있고, 문서는 그 셋을 다른 동사로 구분해 적습니다. execute를 이행으로 읽어 버리면 그 구분이 통째로 사라지고, 남은 일정이 이미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material은 물질과 상관이 없습니다
material을 물질적인이나 재료로 아는 것도 자연스럽지만, 계약서에서는 중대한이라는 뜻입니다.
material breach는 물질적 위반이 아니라 상대가 구제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위반입니다. material term은 그 조항이 없었다면 애초에 계약을 맺지 않았을 만큼 핵심적인 조항을 말하고, 보통 가격이나 수량, 품질, 업무 범위 같은 것들이 여기 들어갑니다.
즉 이 단어는 문서에서 무게를 표시하는 꼬리표입니다. material이 붙어 있으면 그 부분은 가볍게 넘길 자리가 아니라는 신호입니다.
반대로 material이 빠져 있는 것도 정보입니다. 그냥 breach와 material breach는 따라오는 결과가 다르고, 어떤 조항에 material이 붙었는지가 협상의 결과인 경우도 많습니다. 읽을 때 이 단어가 있는 자리와 없는 자리를 구분해 두면 문서의 강약이 보입니다.
discharge는 끝났다는 뜻입니다
일상에서 discharge는 퇴원이나 방출, 해고 쪽으로 익숙합니다. 계약에서는 의무가 소멸했다, 계약이 종료됐다는 뜻입니다.
헷갈리기 쉬운 지점은 이게 나쁜 소식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쪽이 약속한 바를 다 이행하면 그 계약은 discharge됩니다. 사고가 나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끝났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discharged by performance라는 표현은 이행으로 소멸했다, 즉 할 일을 다 해서 계약이 닫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해고나 방출 쪽 뜻을 얹으면 문장이 정반대로 읽힙니다. 끝났다는 사실은 같은데 왜 끝났는지가 뒤집히는 겁니다.
party와 serve, 가장 자주 마주치는 둘
party는 설명이 짧습니다. 계약서의 party는 모임 쪽이 아니라 계약 당사자를 가리킵니다. the parties hereto는 이 계약의 당사자들이라는 뜻이고, 약관 첫 문단에서 거의 항상 만납니다.
serve는 조금 더 낯섭니다. 일상에서는 제공하다나 봉사하다지만, 법적 맥락에서 serve는 서류를 정식으로 송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이 정한 방식대로 상대에게 전달해서 그 사람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을 확실히 하는 절차입니다. to serve notice는 통지를 정식으로 보내는 것이지 통지를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가 특히 성가신 이유는 일상 뜻으로 읽어도 문장이 그럭저럭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통지를 제공한다고 읽어도 뜻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법에서 송달은 형식이 정해진 절차라, 제공했다와 송달했다 사이에는 효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장으로 보기
| 단어 | 일상 뜻 | 문서에서의 뜻 | 자주 보이는 형태 |
|---|---|---|---|
| consideration | 숙고, 배려 | 계약을 성립시키는 대가 | in consideration of |
| execute | 실행하다 | 서명해 효력을 갖게 하다 | duly executed |
| perform | 공연하다 | 약속한 내용을 이행하다 | perform its obligations |
| material | 물질의, 재료 | 중대한 | material breach |
| discharge | 방출, 퇴원 | 의무 소멸, 계약 종료 | discharged by performance |
| party | 모임 | 계약 당사자 | the parties hereto |
| serve | 제공하다 | 서류를 송달하다 | serve notice |
execute와 perform을 나란히 둔 이유는 이 둘이 짝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만 알면 나머지 하나를 같은 뜻으로 읽게 됩니다.
함정을 알아채는 법
읽는 도중에 쓸 수 있는 방법입니다.
- 문장이 어색하지 않은데도 의심해 보세요. 일상 뜻으로 읽어서 말이 된다는 게 맞게 읽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단어들은 그래서 안 걸립니다
- 분야 표시를 읽으세요. 영영사전은 이런 뜻에 law나 legal 같은 표시를 붙여 둡니다. 사전의 분야·격식 표시를 읽는 습관이 여기서 바로 값을 합니다
- 짝으로 다니는 단어를 신호로 삼으세요. hereto, thereof, notwithstanding 같은 말이 보이면 그 문단의 일상 단어들도 법률 뜻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한영사전만으로 확인하지 마세요. 한국어 뜻 한 줄에는 분야 정보가 대개 빠져 있습니다
- 모르겠으면 그 문장을 통째로 표시해 두세요. 단어 하나가 아니라 문장 단위로 확인받는 편이 안전합니다
3번이 의외로 잘 듣습니다. 낯선 법률 부사가 보이는 구간은 그 자체로 경고등입니다. 문서 전체를 의심하며 읽기는 지치지만, 이런 표지가 밀집한 문단만 골라 천천히 읽는 건 할 만합니다.
1번은 습관을 바꾸는 항목이라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는 보통 막힐 때 사전을 열도록 훈련돼 있는데, 여기서 필요한 건 막히지 않을 때 여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불필요해 보이지만 몇 번 겪고 나면 어떤 단어가 이 목록에 속하는지 감이 생깁니다. 저는 아직도 material에서 한 번씩 멈춰서 확인하는데, 그 멈춤이 손해였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 글이 하지 않는 것
한계를 분명히 적어 둡니다.
여기 적은 것은 단어가 다른 뜻으로 서 있다는 사실까지입니다. 조항이 실제로 어떤 효력을 갖는지, 내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 이 글의 범위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서라면 어휘를 안다고 혼자 판단하지 말고 확인을 받으세요.
관할에 따라 다르다는 점도 있습니다. consideration은 영미 계약법의 개념이라 대륙법계를 따르는 나라의 계약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단어의 뜻과 그 뜻이 통하는 범위는 별개입니다.
그래도 알아 두면 달라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영어 약관을 읽다가 아는 단어에서 잠깐 멈추게 되는 것, 그 멈춤 자체가 이 목록이 주는 이득입니다. 뜻을 다 외우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단어를 익힐 때
한 단어에 뜻이 여러 개일 때 어떻게 저장할지는 뜻이 여러 개인 영어 단어 쪽에서 따로 다뤘습니다. 요점은 뜻을 나열해 외우지 말고 뜻마다 쓰이는 자리를 같이 붙여 두라는 것입니다.
보캐비는 29,000개가 넘는 단어 목록의 모든 항목에 발음기호와 원어민 음성, 예문을 함께 붙여 둡니다. 예문이 붙어 있으면 그 단어가 어떤 자리에 서는지가 같이 들어오고, 그게 이런 이중 의미 단어에서는 뜻풀이보다 잘 듣습니다.
App Store에서 Vocaby 받기자주 묻는 질문
- 왜 모르는 단어보다 아는 단어가 더 문제인가요?
- 모르는 단어는 스스로 신호를 보냅니다. 읽다가 막히면 찾아보게 되니까요. 반대로 이미 아는 단어는 아무 저항 없이 읽히고, 그 자리에서 뜻이 달라져 있어도 확인할 계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consideration을 배려로 읽고 문장이 대충 말이 되면 그대로 지나갑니다.
- 이 단어들만 알면 계약서를 읽을 수 있나요?
- 아닙니다. 어휘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이 글은 단어가 다른 뜻으로 서 있다는 걸 알아채는 데까지만 도움이 됩니다. 실제 계약의 효력이나 조항 해석은 전문가의 영역이고, 중요한 문서라면 반드시 확인을 받으세요.
- 이런 뜻은 사전에 나오나요?
- 좋은 영영사전이면 나옵니다. 다만 대개 뜻풀이 목록의 아래쪽에 law나 legal 같은 분야 표시와 함께 붙어 있어서, 첫 번째 뜻만 보고 닫으면 못 봅니다. 분야 표시를 읽는 습관이 이 단어들에서 바로 값을 합니다.
이어서 읽기
영어 이메일이 어색한 건 단어가 아니라 습관 때문입니다
한국어 이메일의 관습을 그대로 영어로 옮기면 정중하게 쓰려다 오히려 어색해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같은 말이 영어에서 어떻게 되는지 하나씩 짚었습니다.
철자는 같은데 발음이 다른 영어 단어
lead와 lead, tear와 tear, wound와 wound. 글자는 똑같은데 소리가 다른 영어 단어가 수백 개 있습니다. 눈으로만 읽으면 절대 걸리지 않고, 그래서 10년을 틀리게 알고 지낼 수 있습니다. 어디에 몰려 있는지, 어떻게 고치는지 정리했습니다.
딱 한 구절에만 살아남은 영어 단어들
혼자서는 아무 데도 못 쓰는데 특정 표현 안에서는 멀쩡히 살아 있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kith, shrift, fro, bated. 어디서 왔는지, 왜 사전을 찾아도 소용이 없는지, 그리고 이런 단어를 어떻게 외워야 하는지 정리했습니다.